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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8B). 승리의 하나님을 찬송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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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8B). 승리의 하나님을 찬송하라

시편 68:19-35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20-09-16

말씀내용
지난 번에 이어 오늘은 시편 68편의 후반부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시편 68편은 해석이 가장 어려운 시편에 속하지만 또한 시편 중에서 가장 활기차고 기운 나게 하는 시편이라고 한 것을 기억하시지요? 이 시편은 언약궤가 시내산에서 시온산에 안착하기까지의 긴 여정을 묘사합니다. 연대적으로 보자면 모세의 시대인 주전 14세기에서 다윗의 시대인 주전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4백 년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드디어 시온산에 좌정하신 하나님은 범사에 당신의 언약 백성을 위하여 싸우시고 승리하신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1절은 광야에서 진을 거두고 행진을 시작하기 위해 언약궤가 먼저 출발할 때 모세가 했던 말의 메아리로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민 10:35).”
이 시편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다윗 왕국을 세운 다윗이 전쟁에서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한 것입니다(삼하 8:6,14; 대상 17:8; 18:6,13). 그러나 이 시편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마귀를 멸하시고 승리하사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것을 내다보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승리하신 주님께서는 교회에게 선물을 주십니다(18; 엡 4:8). 그것이 특별히 지도자 직분의 은사들입니다(엡 4:11). 그 주님께서는 우리를 중요함과 사소함의 세상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우리를 찾아오사 당신의 거룩한 처소로 삼으신다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와 함께 우리의 싸움을 싸워 주십니다. 제가 모세가 진영을 거두고 출발을 하면서 출발하는 언약궤를 보며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할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버거운 사명의 모든 불안과 스트레스를 다 주님께 맡기는 심정으로 그리 했을 것이라고 한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에서 날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1.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19)
19절을 먼저 봅시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19).”
우리는 이 구절과 함께 시편 68편을 통해서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인생은 자신이 앞장 서서 싸우는 길에 하나님께서 따라오시면서 도와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앞장 서서 먼저 모든 대적을 흩으시고 도망하게 하심으로써 그의 인생 걸음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19절의 표현 대로, 날마다 다윗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의 인생은 광야 시절 언약궤가 앞장 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임재를 따라 행했던 삶과 같았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설명되지 않습니다. 19절의 고백 대로,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를 따라, 그리고 그 주님과 함께 가는 인생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날마다’입니다. 가끔 혹은 종종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입니다. 그 ‘날마다’에는 다윗이 전쟁을 치르던 날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가 살아왔던 모든 날들이 다 거기에 포함됩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던 그날에도 하나님은 다윗의 죄짐을 지셨습니다. 우리가 매주일예배를 마치기 전에 부르는 찬송, <날마다 Day by day>의 가사를 음미해보십시오.
날마다 숨쉬는 순간 마다 어려운 일보네

주님 앞에 내 맘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과 평화와 안식을

날마다 주님 내 곁에 계셔 자비로 날 감싸 주시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힘 주시네 위로함 주네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사 항상 평안함 주시도다
내가 살아 숨을 쉬는 동안 살피신다 약속 하셨네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보네
내 맘 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 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 순간 마다 주님 약속 세겨봅니다

어려운 일을 보고 인생의 어려운 순간을 맞는 그 날마다 주님은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이라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그런데 여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짐을 지우시는 주”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렇게 번역을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짐을 지워서 더 무겁고 힘겹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이 경우, KJV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Who daily loadeth us with benefits (날마다 우리에게 은택을 더하시는 주)”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LEB(The Lexham English Bible)도 비슷하게 번역했습니다. “Daily he loads us with benefits(날마다 그는 우리에게 은택을 지우시도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무언가를 지게 하신다면 그것은 은택이요, 은혜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이익이고 유익한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이 조금 버겁다고 느껴질 때면, “하나님께 왜 내게 이런 무거운 짐을 지우시는거지?”라고 묻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등에 무언가를 지우실 때, 그것은 은택이요, 은혜입니다. 상상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 그림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언약궤를 시온산으로 옮긴 다윗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아내 미갈이 천하다고 비웃어도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춤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삼하 6). 이런 분위기가 시편 68편, 특히 후반부를 지배합니다.


2. 원수들을 이기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19-23; 암 9:1-2; 계 11:17-18; 왕상 22:38)
19-23절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이기시고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이 시편의 후반부에서 하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송이고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전에 먼저 그는 원수들의 패배를 선언합니다(19-23).
19절 하반절에서 ‘주 곧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다윗은 20절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짐을 지시기만 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런데 20절에서 ‘구원’이라는 말과 ‘벗어남’이라는 말은 모두 복수로 사용되었습니다. 평생에 싸운 모든 전쟁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구원하셨습니다. 단 한 번이 아니라 수많은 사건들, 평생에 반복되어온 일들을 복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이 치룬 그 많은 전쟁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구원하셨고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주셨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21절에서 하나님은 원수들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의 원수들의 머리 곧 죄를 짓고 다니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시리로다(21).” 20절이 자기 백성에 대한 구원을 말했다면, 21절은 원수들에 대한 무찌름을 말합니다. 두 구절은 명확하게 대조됩니다. 사실 18절에서 언약궤가 시온산(높은 곳)에 안치된 것이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늘 보좌에 앉으심을 상징한다고 할 때, 이미 원수들에 대한 정복은 끝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원수들은, 이미 십자가의 사건을 경험한 신자가 여전히 내재하는 죄와의 싸움을 지속해야 한다는 영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의 머리를, 그 죄짓는 자의 정수리를 깨뜨리실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게 하고(22).”
여기서 ‘그들’이 누구를 의미하는가는 논란이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21절의 원수들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면,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을 완수하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상 원수들로 보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바산은 이스라엘 북부의 높은 산입니다. 이것은 ‘바다 깊은 곳’과 대조됩니다. 원수들이 어디로 도망했든지 하나님은 그들을 있는 곳에서 불러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도망할 수 있는 곳은 없다는 선언입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아모스 9:1–2).” 여기서 하늘과 스올이 각각 바산과 바다 깊은 곳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요한계시록 11:17–18).”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워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3절은 22절에 대한 이런 해석에 잘 맞습니다. “네가 그들을 심히 치고 그들의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집의 개의 혀로 네 원수들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23).”
‘그들의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라는 표현은 군사적 승리를 암시하고, ‘집의 개의 혀로..’라는 표현은 아합 왕의 죽음을 연상케 합니다.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열왕기상 22:38).”
다윗은 이렇게 원수들을 이기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분은 ‘날마다 짐을 지시는 주’이십니다(19).


3. 주님의 개선 행렬에서 드려지는 찬송 (24-27; 삼하 6:1; 엡 4:8)
이제 24-27절은 원수를 이기고 심판하시고 개선하시는 주님의 개선 행렬과 주위 백성들의 찬송을 들려줍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언약궤가 시온산의 성소로 올라가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24절입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이 주께서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로 행차하시는 것이라(24).”
언약궤가 곧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적어도 세 개의 그림을 같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오벧에돔의 집에서 시온산 다윗성으로 가는 언약궤의 행렬입니다. 이 행렬은 3만 명 정도의 행렬이었을 것이고(삼하 6:1), 주변에서는 많은 백성이 축하했을 것입니다. 둘째는 광야에서 앞서 행하는 언약궤, 다윗의 전쟁에서 앞서 행하신 하나님의 그림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바울 사도가 해석했듯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부활,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 앉으시는 그림입니다(엡 4:8).
24절에서 우리는 이런 그림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언약궤의 행렬에서 백성들은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의 행차를 봅니다.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신 것입니다.
25절은 여자들의 찬송을 말합니다. “소고 치는 처녀들 중에서 노래 부르는 자들은 앞서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뒤따르나이다(25).” 마치 11-12절에서 홍해를 건넌 뒤, 미리암과 여성들의 찬송을 연상하게 했듯이, 여기서도 그런 그림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26절에는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 이스라엘은 야곱을 가리킵니다. 야곱에게서 나온 민족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에게서 나온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다윗은 말합니다. 그들 중에는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고관과…스불론의 고관과 납달리의 고관’이 있습니다(27). 열 두 지파 중 네 지파의 이름입니다. 베냐민과 유다 지파는 남쪽의 지파이고 스불론과 납달리는 북쪽의 지파입니다. 후일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을 때, 그들은 각각 유다와 이스라엘에 속하게 된 지파들입니다. 이렇게 대표적으로 네 지파를 언급함으로써 다윗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을 주관하는 작은 베냐민’이라는 표현은 베냐민 지파는 작은 지파였지만 그 지파에서 사울 왕이 나왔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합니다.


4. 장래의 승리에 대한 기대 (28-31; 마 2:1-12; 사 27:1; 왕상 10:1-10; 행 8:26-39; 계 11:15)
이제 28-31절에서 다윗은 주님을 신실한 믿음으로 따르는 자들이 기대해도 좋을 장래의 승리에 대해서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승리와는 비할 수 없는 큰 승리가 주어질 것을 그는 기대합니다. 먼저 28절입니다.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28).”
이것은 기도, 힘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다윗은 이 약속을 의지하여 구합니다. “그 힘을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다윗이 바라는 장래의 크고도 영광스러운 승리는 무엇입니까? 29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29).” 이 말씀은 예언인데, 동방박사들이 막 탄생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러 와서 예수님께 준비한 예물들을 드렸을 때 온전한 의미에서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마 2:1-12).
이제 30절을 보십시오.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에 밟으소서 그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30).” ‘갈밭의 들짐승’ 곧 갈대에 살고 있는 존재는 악어나 하마와 같은 것으로, 애굽을 특정하는 말입니다(사 27:1). 짐승은 어떤 지배적 힘을 가진 세력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수소와 송아지는 크고 작은 대적자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 대적자들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실 것입니다. ‘은 조각을 발 아래에 밟으소서’라는 표현은 해석이 어렵습니다. 아마 ‘은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소서’ 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은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요일 2:15-17), 물질과 탐욕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러면, 31절에 “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31).”는 말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애굽은 다윗 당대에 대제국으로 참 종교인 여호와 신앙을 대적하는 세력을 상징했고 구스(에디오피아)는 가장 멀리 있는 땅끝의 나라를 대표했습니다. 그런데 고관들이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이 하나님을 향해 손을 신속히 든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암시합니다. 솔로몬에게 많은 선물을 가지고 찾아왔던 스바 여왕이나 (왕상 10:1-10; 스바는 에디오피아 지역으로 추정),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찾아왔던 에디오피아 내시가 빌립을 통해 복음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는 장면에서(행 8:26-39), 이 예언의 성취가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대국 애굽과 땅끝 나라 구스가 하나님께 복종하게 될 것을 언급한 것은, 결국 세상 모든 나라가 하나님 앞에 복종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계 11:15).


5.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과 능력 (32-35; 마 28:18-20; 삼하 8:6,14; 대상 17:8; 18:6,13)
이제 끝으로 우리는 32-35절에서 다윗이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을 향하여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그리고 능력을 찬양하라고 초청하는 것을 봅니다. 이 부분은 짧지 않은 이 시편의 폐막 합창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먼저 32-33절을 보지요. “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32–33).”
다윗은 땅의 왕국들을 불러 하나님께 노래하고 찬송하라고 초청합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대위임령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대위임령의 전제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찬송과 예배를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시다는 것입니다. 페로운(J.J.Stewart Perowne)은 말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땅의 왕국들, 모든 나라가 주를 찬양할 것을 기대하는 순간, 그 자신이 미래에 임할 영광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다.”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이야기입니까?
다윗은 자기 백성을 향해서 또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34).”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모든 능력과 위엄과 능력을 돌립니다. 끝으로 35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35).”
다윗은 성소의 언약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엄을 나타내시는 것을 봅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과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힘과 능력을 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능력으로 그 백성은 애굽에서 나왔고 광야를 지났으며 가나안을 정복했고 나라를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짐을 져 주셨고 필요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셨습니다(삼하 8:6,14; 대상 17:8; 18:6,13).


6. 교훈과 적용 (빌 2:10-11; 계 7:9-10; 고후 4:17)
이 시편에 담긴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찬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10–11).”
다윗이 멀리 내다보고 이런 찬송을 드렸다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승리와 영광을 내다봅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 감격스럽게 승리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속에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께’ 찬송을 돌릴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계 7:9-10).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마다 그날을 기대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모든 나라가 주를 찬송할 것을 기대했을 때 그가 이미 미래의 영광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고 한 페로운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을 찬송할 때 누리는 영광입니다.
이렇게 찬송할 특별한 이유가 더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고, 이 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모든 권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백성이 어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지만, 우리는 구주 예수님께서 이미 이기셨고 또 영광 중에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압니다. 세상은 비웃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실로 무섭고(히 10:31)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날에 모든 정의가 바로 잡힐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까지 우리는 그저 자기 짐을 스스로 지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윗이 맛보았고 고백했듯이, 그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이십니다. 이것은 목자가 병들고 약한 양을 품에 안아 안전한 데로 옮겨다 놓는 그림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죄와 억압에 빠지고 눌려서 결국 파멸에 이르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 ‘날마다’를 날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누군가를 매일 날마다 돌보려다 보면 지치고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돌보시는 일에서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잠깐 받는 고난의 가벼움을 영원한 영광의 무게와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린도후서 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