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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2). 의로운 왕이 영원히 다스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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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2). 의로운 왕이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편 72:1-20, 창세기 18:19, 요한계시록 11:15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20-12-16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시편 72편을 상고함으로써 전체 5권으로 편집된 시편의 제2권을 마치게 됩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는 본문 20절은 72편에 속하기도 하지만, 72편의 결론으로서 역할을 합니다


1. 시편의 저자, 성격 그리고 구조
[왕을 위한 기도]인 시편 72편은 제왕시에 속하고 메시아 시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마 이 시편은 왕의 취임식에서 왕과 왕의 통치를 축복하면서 불려졌을 것인데, 나라가 망하고 더 이상 왕이 존재하지 않던 포로기 이후에는 메시아를 대망하는 노래로 불려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표제어는 [솔로몬의 시]라고 밝히는데, 이 표제어가 붙은 것은 본 72편 외에 127편이 있습니다. 이런 표제어에도 불구하고 72편의 저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헬라어역인 70인역에서는 [솔로몬을 위한 시]라고 되어있고 시리아역 사본에서는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삼았을 때 다윗이 지은 시편”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논란을 잘 보여줍니다. 또 이 시편의 내용도, 솔로몬 보다는 다윗의 저작 가능성을 더욱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애쉬는 “표제는 백성이 솔로몬과 그 후계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다윗이 쓴 기도라는 뜻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는 근거 중 하나는, 후기인 20절 때문입니다. 표제어는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있지만, 후기는 ‘다윗의 기도’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 두 부분을 조화시켜 보려는 것입니다. 16세기의 칼빈이나 19세기의 찰스 스펄전도 크리스토퍼 애쉬와 비슷한 입장을 보여 줍니다. 칼빈은 다윗의 기도를 솔로몬이 기록했을 것이라고 설명했고, 스펄전은 “다윗의 기도, 솔로몬의 시편”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이런 설명들을 근거로, 우리는 노년의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기도했던 내용을 솔로몬이 기록했을 것이라는 정도의 이해를 가지고 이 시편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상고하기 전에 먼저, 이 시편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정치관에 대해서 매우 적실성있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솔로몬과 이어지는 다윗 자손의 왕들의 통치를 보여주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통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치관은 바로 이 본문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통치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주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72편은 후기인 20절을 제외하면 여섯 연으로 구분됩니다. 1-4절은 왕의 통치의 특징인 공의와 정의를, 5-7절은 왕의 통치의 시간적 무궁함을, 8-11절은 그 나라의 무한한 지리적 확장을, 12-14절은 왕의 통치의 또 다른 특징인 긍휼과 자비를 말하고, 15-17절에서 그 통치의 축복, 즉 그 나라가 얼마나 복된 나라인지를 보여주며 송영으로 마치게 됩니다.
말씀드린대로, 이 시편은 일차적으로는 다윗이나 솔로몬의 기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인간-왕에게서 완전히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시아-그리스도의 왕국의 성격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사모하는 심정으로 이 시편을 읽어야 합니다.


2. 공의와 정의 (1-4; 왕상 3:9; 막 12:30-31; 딛 2:14; 창 18:19)
먼저 왕의 통치의 특징을 말씀하는 첫번째 연에서(1-4) 1-2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시편 72:1–2).”
1절은 분명히 기도입니다. 왕을 위한 기도인데, 왕에게 주의 판단력을. 왕의 아들에게 주의 공의를 주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왕의 아들이 왕위에 즉위한 뒤, 선왕과 백성이 새 왕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 혹은 대대로 왕들을 위한 기도로 읽으면 어색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왕에게 주시기를 바라는 판단력과 공의는, 좋은 판단력과 괜찮은 공의가 아니라, ‘주의 판단력’과 ‘주의 공의’입니다. 이 간구는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을 때 구했던 기도를 생각하게 합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열왕기상 3:9).”
2절은 1절의 기도의 응답의 결과로 나타날 일을 보여줍니다. 왕이 공의로 재판하며 정의로 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판단력과 공의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1절의 판단력은 2절의 정의와 같은 단어이고, 공의는 1,2절에 각각 사용되었으니, 여기서 공의와 정의가 모두 2번씩 사용된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 이 두 가치는 왕의 의로운 통치의 성격을 형성하는 두 기둥입니다.
그렇다면, 공의와 정의는 무엇이며 서로 어떻게 구분됩니까? 대개 구약성경에서 공의(righteousness)로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쩨다카(צְדָקָה)’입니다. 공의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전제로 하는 개념으로, 언약관계를 신실하게 지키는 것이 공의입니다. 언약의 내용은 율법 안에 충분히 나타났고, 그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그 핵심을 말씀하셨습니다(막 12:30-31). 언약에 충실한 삶이란, 하나님께 신실하게 행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이웃을 이롭게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디도서 2:14).”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을 이렇게 밝히십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세기 18:19).” 여기서 ‘의’가 공의를 가리키고, ‘공도’는 정의를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정의(justice)를 의미하는 ‘공도’는 히브리말로 ‘미쉬파트(מִשְׁפָּט)’라고 읽고, 주로 ‘결정, 판결’의 의미를 가지는 사법적 정의의 개념을 가리킵니다. 본문 1절에서는 ‘판단력’으로, 2절에서는 ‘정의’로 번역되었고 역시 재판이나 판결을 통해 사법적 정의를 실현한다는 의미입니다. 한 사회에서 재판이 바르게 행해진다면, 그 사회는 비교적 정의로운 사회일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적 맥락에서 공의를 행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는 사법적 맥락의 정의도 자연히 많아질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는 억울한 사람이 적어지고,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고 베푸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래서 지금 시인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왕에게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력과 하나님의 공의를 왕의 마음에 주시면, 그것들이 왕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될 것이고 왕은 그 사회의 최고 통치자로서, 공의와 정의를 구현하게 될 것입니다. 왕이야말로 공의와 정의를 수행할 가장 중요한 책임자가 아닙니까?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왕에게 공의와 정의를 허락하시면, 2절 이하에서 보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왕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할 것입니다(2). 재판의 공정함은 통치의 근간입니다. 그리고 왕이 공의와 정의를 확고하게 세워가야 할 대상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의 백성’이고 ‘주의 가난한 자(들)’입니다. 왕이 자기에게 맡겨진 주의 백성과 주의 가난한 자들에게 공의와 정의를 베풀어야 한다는 말은, 언약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되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라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왕을 높이시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또 왕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을 통치한다면, 백성은 그를 하나님이 세운 왕으로 인정하리라는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재판하다’라는 단어를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 말은 본래 ‘신원하다, 억울함을 풀어주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재판은 그렇게 함으로써 사법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4절은 그 의미를 풀어 설명합니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편 72:4).”
한 마디로 정의를 바르게 세우려면,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는 것 그리고 압박하는 자를 꺾는 일이 반드시 수반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 유념해야 하는 타협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왕에게 하나님께서 공의와 정의를 주시는 결과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3절을 보지요.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시편 72:3).”
자연도 반응하여, 풍성한 수확을 준다는 개념이 더해집니다. 산과 작은 산은 제유법으로 모든 지역을 가리키고 특별히 풍성한 결실을 주는 비옥한 지역을 의미합니다. 평강(שָׁלוֹם)은, 번영, 풍성한 수확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까? ‘의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여기서 의는 ‘공의’를 가리킵니다. 왕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언약에 충실하게, 공의와 정의를 행함으로 선정을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연이 조화롭게 반응을 하게 하여 복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 무궁한 나라 (5-7; 삼하 7:12-13; 왕상 4:25; 잠 28:28; 29:2)
두번째 연(5-7)은 그 나라가 무궁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왕이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나라는 무궁할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2–13).”
5절에서 ‘해가 있을 동안에도, 달이 있을 동안에도’라는 표현은 왕의 통치가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왕의 의로운 통치가 그 나라의 무궁함을 가져올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시편 72:6).”
‘벤 풀’은 쉽게 말라 죽습니다. 하지만 그 위에 비가 촉촉히 내리면 생명이 연장될 것입니다. 선정을 베푸는 의로운 왕의 존재는 백성에게 마른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이 왕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늘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7절입니다.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시 72:7).”
왕의 의로운 통치는 곡식의 풍성함(‘평강의 풍성함’)과 함께 의인의 흥왕함을 가져올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대한 성경의 한 묘사를 보십시다.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열왕기상 4:25).”
얼마나 아름다운 묘사입니까? 슬프게도 솔로몬의 통치 초기에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은 잠깐일 뿐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을지라도, 인간이 이룰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 입니다. 솔로몬의 시대에 비록 한때였을지라도 이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된다면 얼마나 영구히 복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잠언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잠언 28:28; 29:2).”


4. 나라의 무한한 확장 (8-11; 계 11:15; 왕상 10:23-25; 마 2:11; 계 15:4; 21:24)
세번째 연은 8-11절로, 그 나라(통치)의 경계가 무한히 확장되어 우주적인 나라가 될 것을 말합니다. ‘바다에서 바다까지’는 전세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강’은 유프라테스 강을, ‘땅 끝’은 말 그대로, 그 강 너머 가장 멀리 있는 지경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전세계적인 왕국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메시아의 나라에서 성취될 것인데, 요한계시록은 그 성취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요한계시록 11:15).”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 그리스도의 나라의 확장은 복음전도를 통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어 온 것을 이천 년의 교회 역사는 잘 보여줍니다.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확장은 ‘광야에서 사는 자’까지 복종하게 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대적하는 원수들은 티끌을 핥는 수치와 낮아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9). ‘광야에 사는 자’는 아라비아 만의 광야에 사는 유목민 부족들, 또는 남쪽의 다스리기 쉽지 않은 흩어져 사는 부족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10절에는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고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11절에는 모든 왕이 그 앞에 부복하고 모든 민족이 그를 섬기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지명, 지역들은 지중해 방향의 서쪽 지역들, 섬들, 해안 지역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모습은 솔로몬 시대에 어느 정도 일어났던 일입니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그들이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그리하였더라(열왕기상 10:23–25).”
또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탄생 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일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태복음 2:11).”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계 15:4)”라는 말씀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계 21:24).”는 말씀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5. 긍휼과 자비 (12-14; 막 10:46-52)
네번째 연은 12-14절인데, 의로운 왕의 통치의 또 하나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긍휼과 자비입니다.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시편 72:12–13).”
사실 11절까지는 모두 기도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12절부터는 그 성격이 서술 또는 묘사로 분명히 전환됩니다. 의로운 왕과 왕의 통치에 대한 묘사입니다. 왕은 궁핍한 자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를 건지는 긍휼과 자비를 가진 왕입니다. 여기 ‘궁핍한 자’는 경제적으로 빈곤하거나, 하급 신분에 속한 사람 혹은 정치적으로 힘이 없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는 2절에서도 나왔지만, 억눌리고 마음이 상한 가난한 자들을 가리키는데 주로 고아와 과부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13절에 나온 ‘가난한 자’는 ‘약하고 비천하고 하찮은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왕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긍휼이 왕의 마음을 움직여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게 합니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겨 그의 눈을 열어주셨던 일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막 10:46-52).
14절을 봅니다.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시편 72:14).”
‘그들의 피’는 가난한 자들의 피, 하찮은 자들의 피,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의 피를 가리킵니다. 왕은 그들의 피를 존귀히 여깁니다. 세상 통치자들에게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의 피는 수에 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왕중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러지 않으십니다. 이 일로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 권력자들에게 무시당하는 가난한 자들의 피를 주님은 존귀히 여기시고 마지막 심판좌에서 그 피값을 찾으실 것입니다. 모든 세상 통치자들은 이 두려운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믿는 정치인들, 위정자들은 얼마나 주를 두려워함으로 이 일을 감당해야겠습니까?
여기서 의로운 왕은 율법의 기업 무를 자로 행동합니다. 구약 율법의 기업 무를 자는 복수자, 신원자, 빚을 갚아주는 자, 잃은 기업을 되사주는 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의로운 왕은 정의를 세우실 것입니다.


6. 복된 나라 (15-20; 창 12:1-3)
마지막 연인 15-19절은 왕의 통치가 얼마나 복된지를 보여주는 송영입니다. 15절을 먼저 볼까요?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시편 72:15).”
여러분, 이 말씀이 어떻게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교회를 통해서 성취된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됨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지 않습니까?
16절과 17절은 그 나라의 번영과 왕성함 그리고 영구함을 말하면서, 사람들이 왕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이 성취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세기 12:1–3).”
이제 시인은 18-19절에서 그 왕을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으로써 왕을 위한 기도를 마칩니다. 그리고 20절은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시편 제2권의 후기입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시편 72:20).”
찰스 스펄전은 이 구절에도 주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후기는 다윗을 왕으로 제시하지 않고 다만 ‘이새의 아들 다윗’이라는 평범한 한 사람의 기도로 제시한다.” 진정으로 높임을 받으셔야 하는 우리의 왕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7. 교훈과 적용 (사 52:7; 마 11:28-30; 6:33)
이 시편을 20절의 후기대로, 다윗의 기도라고 읽을 때, 다윗이 기도한 공의와 정의의 통치는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천 년이 흘러 다윗의 위대한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복음을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Your God reigns)”는 소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이사야 52:7).”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은 좋은 소식 중의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로몬의 통치의 시작은 좋았지만, 그는 평생 수많은 건축을 무리하게 진행함으로써 약하고 도움 없는 자들의 압제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간 지도자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0).”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을 통해 어떻게 정치관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세상 정치는 언제나 이 시편에 기록된 의로운 통치를 성취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일정한 한계와 제한을 가지고 정치에 관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인간의 정치를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사적 이익의 차원에서 정치에 접근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동기는 언제나 사적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동기여야만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통치-다스림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세우고, 긍휼과 자비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간구했던 내용이 그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의’에서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인데, 구약성경에서 ‘공의(צְדָקָה)’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삶, 하나님께 신실한 믿음으로 행하고, 이웃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그들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시민은 그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든 소극적으로 참여하든, 이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중심 동기로 삼고 참여해야 합니다. 공의와 정의가 드러나는 사회, 약자들에 대한 긍휼과 자비가 시행되는 사회가 되도록 정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정치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정당에 속하여 정당의 이익을 추구할 때에도, 언제나 자신들에게는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정치인이든, 일반 시민이든,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을 하나님의 대표자,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자로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간절히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대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0a)!”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 정치의 한계와 실패, 정치인들의 탐욕과 부패를 반복적으로 대하면서, 또는 반대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정치를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구할 것은, 이 세상 나라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계 11:15).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처럼 이 기도가 필요한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의로운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 통치가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재림 때, 그 통치는 완성될 것입니다.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나와 내 가정, 우리 교회, 우리 나라, 이 세상에 그 은혜의 날이 성취되기를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