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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8A).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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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8A).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시편 68:1-18, 민수기 10:35, 에베소서 4:8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20-09-02

말씀내용
1. 난해 하지만 활기차고 기운 나게 하는 시편(삼하 6:12; 민 10:33-36)
시편 68편은 두 가지 평가를 받고 있는 시편입니다. 첫째는 해석이 가장 어려운 시편이라는 것인데,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합니다. 또 하나의 평가는, 시편 중 가장 활기차고 기운 나게 하는 시편이라는 것입니다. 데렉 키드너는 쏟아지는 폭포수와 같은 성격을 시편이라고 표현합니다.
시편 68편이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를 몇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오직 이 시편에만 등장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무려 15개입니다. 게다가 68편은 매우 다양한 이미지들의 콜라주(collage)와 같습니다. 또 이 시편 안에만 하나님의 성호가 ‘여호와, 야, 엘로힘, 아도나이, 샤다이, 시내산의 그분, 이스라엘의 하나님’ 등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이것들이 이 시편이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들입니다.
한편 이 시편이 활기차고 기운 나게 하는 시편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이나 데렉 키드너는 이 시편이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 시온산으로 옮겨가려고 할 때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삼하 6:12). 그래서 이 시편의 중심에는 언약궤가 있고 출애굽후 시내산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는 언약궤의 행진이 68편의 주제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시내산에서 만들어진 언약궤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선두에서 그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민 10:33–34).”
말하자면, 언약궤의 존재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의 상징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님의 실재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을 시작하고 멈출 때마다 익숙하게 행해지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민수기 10장 35-36절에서 설명됩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수기 10:35–36).”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언약궤가 단지 인도의 역할을 넘어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역할도 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백성이 텐트를 거두고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때 모세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세력은 다 흩어지고 도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선언이었고 확실한 응답을 보장받는 기도였습니다.
이 모세의 선언-기도로 시작하는(1-2절) 68편은 언약궤의 출발과 행진과 최종적 승리를 중단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폭포수 같이 쏟아지는 느낌이며 가장 활기차고 기운 나게 하는 시편인 것입니다.


2. 전쟁 승리의 시편(18; 엡 4:8,11)
68편에 대해서 하나 더 말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68편이 전쟁 승리의 시라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언약궤의 행진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싸움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바라거나 기념할 때 종종 68편의 1-2절을 읽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프랑스 휴그노들이 카톨릭 동맹군에게 포위되어 어려운 전세에 있을 때에도 그들은 이 시편을 노래하였고 영국의 크롬웰도 종종 이 구절을 읽었다고 전해집니다. 무엇보다 유명한 역사적 사건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대육군이 러시아로 진격하여 모스크바에 무혈 입성하였던 1812년(9월 14일)의 일입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모스크바에 들어갔을 때, 모스크바는 주요시설과 곡식들은 이미 러시아 군에 의해 다 파괴되고 불타버린 텅 빈 도시였습니다. 월동 준비를 대비하지 못했고 보급로마처 차단된 프랑스 대육군은 모스크바에서 춥고 매서운 겨울을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한 달 반을 버티지 못하고 철군을 결정하지만, 그의 군대가 안전지대로 퇴각했을 때는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군인이 5천 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8만 5천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은 것입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군대의 모스크바 퇴각을 매우 큰 승리의 날로 기념하는데, 이 승리의 7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곡이 차이코프스키의 ⟪1812 Overture(축제서곡 1812년)⟫(1880)입니다. 프랑스 군대가 퇴각하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온 사람들이 모스크바 대성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 바로 이 시편이 큰 소리로 읽혀졌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시편 68편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표현하는 시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이 시편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승리는 사실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속죄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것을 말하려고 18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 또 본문 18절입니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시편 68:18).”
다시 말하지만, 본문은 시내산에서 출발한 언약궤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정해 놓으신 곳인 시온 산에 올라가 안치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 보좌에 앉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인용합니다. 두 본문 모두 같은 성령님께서 다윗과 바울을 감동하여 쓰신 것이고,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 본문을 해석한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언약궤가 시온산에 오는 것이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서의 전쟁을 모두 마치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안에서 완전한 승리를 얻으신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넘어, 하나님 자신이신 성자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사 임마누엘이 되어 주셨고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멸하신 승리를 얻으신 뒤에 승천하신 일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시 68:18)와 ‘사로잡혔던 자를 사로잡으시고’(엡 4:8)가 의미하는 것은 주님께서 죽음과 사탄을 포로로 잡으시고 승천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8절은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라고 한 반면, 바울 사도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엡 4:8)고 썼습니다. 이것은 물론 고대 시리아어와 아람어 역본의 시편 68:18에서는 ‘주었다’고 되어있다는 사실로 설명되거나, 시편 본문에서 사람들에게서 받으셨다는 것을 주로 ‘반역자들로부터’ 전리품을 받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에베소서에서는 ‘교회에게는 선물을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교회에게 주신 선물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와 같은 지도자들을 은사(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 사도가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본문의 언약궤의 행진은 결국 메시아와 그 사역을 가리키는 것이고, 따라서 68편은 메시아의 승리를 기념하는 메시아의 시편으로서 읽혀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두 차례에 걸쳐서 상고할텐데 오늘은 그 절반인 1-18절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3.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개선 행진(1-6; 민 10:35; 시 68:19; 삼상 2:7-10; 눅 1:51-53)
보통 개선 행진이라고 하면 로마제국의 개선 행진을 떠올리곤 합니다. 본문의 서론에 해당하는 첫째 연(1-6절)이 보여주는 것이 개선 행진의 그림입니다. 물론 언약궤의 행진이지만, 이것은 곧 하나님 자신의 행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절은 자기 백성의 찬송을 받으시면서 개선 행진을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들떠 있고 승리를 기념하는 기쁨이 충만한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데렉 키드너는 이 단락(1-6절)의 제목을 ‘승리의 팡파레(a fanfare of praise)라고 붙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1-2절은 민수기 10:35을 재연합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민수기 10:35).”
이 말을 40년 동안 가장 많이 했을 모세를 생각해봅시다. 그 많은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 40년의 여정을 지나야 했던 모세는 인간적으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겪어야 했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궤가 앞서 행함으로써 친히 그 백성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다는 것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 구절을 말할 때마다, 가슴으로는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일어나셔서 대적들을 흩으시고 도망하게 하옵소서. 이 싸움은 제가 싸울 싸움도 아니고 이들은 제가 인도할 백성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 주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저는 압니다. 제 모든 염려와 스트레스는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이런 마음으로 모세는 진영에서 새롭게 출발을 할 때마다 이 선언을 되풀이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모세의 마음을 잘 담아낸 구절이 본문 19절입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시 68:19).”
이 시편은 표제어에 있듯이, 다윗의 시입니다. 하나님의 큰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다윗이 가진 마음은 모세와 얼마나 달랐겠습니까? 다윗은 자신만만하게 왕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넘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시간을 제외한다면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전쟁이 있었고 그 인생에 얼마나 복잡한 일들이 많았습니까?
2절은 원수들이 흩어지고 도망하는 것을, ‘연기가 불려가듯이’ 또는 ‘불 앞에서 밀(랍)이 녹음 같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종종 세상은 무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박해하고 물리적 위해를 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원수들은 맥을 추지 못하고 연기처럼 불려가고, 밀랍처럼 녹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무적이었던 나폴레옹과 프랑스 대육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하고도 1개월 밖에 견디지 못하고 철군하여 결국 9/10가 죽은 일은 이 말씀을 생각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언약궤의 인도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은 훈련된 군사 조직을 갖춘 나라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민족과 나라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무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당혹케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하나님은 얼마나 쉽게 원수들의 책동을 뒤엎어 놓으시는지!”(John Calvin, Calvin’s Commentaries, 23 vols. (1848; repr., Grand Rapids: Baker, 2009), 6:7.; Phillips, R. D. (2019). Psalms 42–72. (R. D. Phillips, P. G. Ryken, & I. M. Duguid, Ed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다윗도 이것을 수많은 전쟁 속에서 경험했고 그 고백을 이 시편에 담아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윗에게 그것은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겪은 사실들이었습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동일하게 경험되는 실재입니다. 한나의 고백과 마리아의 송가가 이것을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사무엘상 2:7–10).”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누가복음 1:51–53).”
그래서 3-4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외쳐 찬송을 돌립니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시편 68:3–4).”
만일,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을 삶 속에서 경험하고 살아간다면, 찬송이 터져 나오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3-4절이 보여주는 찬송은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춤추는 찬송입니다. ‘대로를 수축하라’는 것은 언약궤가 나아갈 길을 건설하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자기 백성 앞에서 행진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5-6절입니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시편 68:5–6).”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행진하는 곳, 승리하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십니까? 고아에게 제일 필요한 존재는 아버지입니다. 물론 여기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포함하는 부모의 개념입니다. 그리고 과부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재판장입니다. 왜냐하면 과부는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없고 법적 권리 주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고독한 자들, 갇힌 자들, 그리고 거역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고독한 자들에게는 가족을 주시고, 갇힌 자들에게는 자유와 형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은 메마른 땅을 거처로 삼게 될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행동은 조금의 모호함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자리에서 나타나야할 태도가 아닙니까? 이것이 68편의 서론 격인 1-6절이 말씀하는 바입니다.


4. 시내산에서 시온산까지(7-14; 시 78:24,28; 출 15:20; 삿 5:24-26)
이제 7-14절에서는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부터 시온산까지의 긴 행진에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입증해주는 사진들의 콜라주가 등장합니다.
7절은 광야에서의 행진을, 8절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 산이 진동하던 모습을 회상합니다. 9절에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라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비가 문자적인 비를 의미한다고 보면, 주의 기업은 가나안 땅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러나 비가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어 ‘비처럼 내린 만나’를 의미한다면(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시편 78:24), 기업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킬 것입니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본문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10절도 해석이 난해합니다.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라고 할 때 ‘회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회중은 문자적으로는 ‘살아있는 피조물’을 가리키고, 보통 동물을 지칭하는데, 경우에 따라서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만일 9절에서 비를 만나로 해석한다면, 여기서 ‘회중’은 메추라기를 의미할 수 있고(시 78:28), 광야에서 음식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가 문자적 비이고 가나안 땅에 내린 비라면, ‘회중’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즐거워했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킬 것입니다. 여기서도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안전한 거처를 제공하셨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언약궤의 행진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여인들의 무리가 그 은혜를 누린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11-14절이 그 내용입니다. 11절에서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라는 말은 천둥소리로 적을 달아나게 하신 것이든지,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이든지, 아니면 승리의 노래를 주어 부르게 하신 것이든지 여인의 무리가 이 기쁨을 누린다는 것을 시사하는데, 갈라진 홍해를 건넌 뒤에 미리암과 여인들이 기쁨의 찬송을 올렸던 일을 암시합니다(출 15:20).
12절에서 도망가는 ‘여러 군대의 왕들’은 가나안의 왕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어느 새 광야로부터 가나안 땅에서의 정복 전쟁으로 넘어왔습니다. 12절은 하솔 왕 야빈의 군대 장관이던 시스라와 그를 돕던 가나안의 왕들을 가리키는 듯 하고, ‘집에 있던 여자들도 탈취물을 나누도다’라는 말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자기 장막에 들어온 시스라를 말뚝으로 박아 죽인 일을 연상하게 합니다(삿 5:24-26). 또한 가나안 정복 전쟁 때, 전사들이 집으로 가져온 전리품들을 아내들이 집안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모습을 연상하게도 합니다.
13절도 난해합니다.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호합니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고 다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당시 여성들에게 인기있던 장신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평안히 여성들이 누워서 탈취물 중에서 그런 값비싼 장신구를 가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14절은 원수인 왕들이 하나님 앞에서 흩어지는 모습을 그리는데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라고 합니다. 살몬은 세겜에서 가까운 북쪽에 있는 산인데, 캄캄하고 어둡다는 뜻입니다. 왕들이 흩어졌을 때, 그 시체들이 누워있는 모습이 검은 산에 눈이 흩날려 붙은 것처럼 보인다는 뜻 같습니다.


5. 하나님이 선택하신 시온산(15-18)
끝으로 15-18절은 하나님께서 시온산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고 그 산에 언약궤가 안치되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왜 시온산인가 하는 질문이 여기에 있습니다. 시온산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이 아니었습니다. 산 중의 산이라면 사람들은 당연히 높은 산이 최고의 산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15절에는 “바산의 산이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산’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의 산’인데, 엘로힘은 이 경우에 최상급으로 ‘가장 뛰어난 산, 높은 산, 강력한 산’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NIV, NLT, NET, The Message). 이렇게 높은 바산의 산에 비하면, 시온산은 낮은 언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16절에서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고 묻습니다. 산의 가치는 높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가로 결정됩니다. 16절 하반절입니다.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 하나님이 계시겠다고 택하신 산이기 때문에 시온산은 거룩하고 존귀합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 모든 교회에게 적용됩니다. 사람의 가치, 교회의 가치는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는가로 결정됩니다.
이제 17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시온산에 오르는 모습을 마치 전쟁에서 왕의 군대가 행진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다시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라고 말합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 그 산이 진동했던 것처럼(8절), 지금 시온산이 그렇게 하나님의 오르심으로 말미암아 진동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끝으로 18절에서 언약궤가 시온산에 안치되는 것을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신다”고 표현합니다. 그때 전쟁에서 승리한 왕으로서 반역자들, 원수들로부터 전리품을 취하시듯이 선물을 받으십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영감으로 언약궤의 시온산 안치가 그리스도의 승천의 모형이라고 이해했습니다.
6. 교훈과 적용
이제 이 말씀을 통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봅시다.

A.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모든 문제를 이긴다.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과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합니다. 물론 여전히 우리 삶은 아직 천국에 완전히 이르지 못했고, 여전히 육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싸움이 있고 전쟁이 있습니다. 물질적 궁핍의 문제, 건강의 상실의 문제, 끊어낼 수 없는 사랑하는 이들의 아픔과 약함들, 이런 문제들로 인해 인생이 버겁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1절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이런 것들은 다 흩어지고 도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연기처럼 사라지고 밀랍처럼 녹을 것입니다. 이런 많은 인생의 난제들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가 늘 기억하고 주장할 숙제는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러분과 제 삶 뿐 아니라, 우리 주변과 온 세상의 만사를 주관하고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십시오.
존 뉴턴은 시편 68:18을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적들과 어려움에 둘러 쌓여 살아갈지라도, 모든 고소와 비난과 위협에 대항하여 우리는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 되신 분은 하늘에 계시다. 아버지 옆에는 우리의 대언자가 계시고, 보좌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계시다. 그는 우리의 중보자이시기에 우리를 최고로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구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우리가 간구하는 모든 것이다.””
칼빈은 말합니다. “교회의 대적들이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준비는 (하나님에 의해) 뒤엎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배운다.” 원수가 어떻게 해도 주의 백성을, 교회를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모든 일을 마치시고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서 온 세상을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 성도의 일생 동안 성도의 앞에서 행하시면서 그 인생을 인도하시고 모든 싸움에서 이기게 하십니다. 성도는 이런 존재입니다.

B. 존귀함의 가치는 하나님이 거하시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본문을 통해서 얻는 두번째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이 세상에서 말하는 학위와 학벌, 물질과 부, 명예와 직위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온산은 이스라엘의 다른 산들보다 더 높고 장엄해서 거룩한 산이 된 것이 아닙니다. 존귀함을 결정하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하시기로 택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신자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시고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존귀함을 결정하는 요소입니다. 이것을 언제나 아십시오. 세상의 다른 것들은 다 있다가 없어지는 아침 안개 같은 것들이고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제임스 보이스의 말입니다. “만일 스스로 가난하고 약하고 별볼일 없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을 핸디캡이거나 불리한 조건이라고 여기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그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기회로 여겨라.”(Boice, J. M. (2005). Psalms 42–106: An Expositional Commentary (p. 557). Grand Rapids, MI: Baker Books.)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보는 관점이고 복음의 렌즈로 보는 자기를 보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문제들 속에서, 가변적인 주변 상황이나 자신의 상황 변화 속에서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거처 삼으셔서 내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인도하시고 앞서 행하시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장된 이 은혜 안에서 기뻐하십시오.